'키리시탄 금교의 시대로'

 

바쿠후가 겁낸 서양,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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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성터에서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세 개의 석상>

 

1603년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바쿠후(무가정권)를 열고 전국을 통일하였다. 무역에 대하여는 바쿠후 발행의 주인장(쩡권의 도장이 찍힌 통상허가 증서)를 가진 선박만이 무역을 할 수 있는 주인선무역이 시작되었다. 키리시탄다이묘(영주) 아리마하루노부는 예수회와 그리고 바쿠후와도 관계를 악화시키는 큰 두가지 사건에 의해서 실각한다. 이 사건후부터 바쿠후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를 금하는 정책이 제안되고 시마바라반도의 화려한 키리시탄사는 암전한다. 새로이 시마바라반도를 통치하게 된 다이묘(영주)들은 영내의 사람들에게 배교할 것을 가요하고 고문과 탄압을 반복하였다.

 

1637년 기근과 흉작, 악정에 고생하는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백성들은 드디어 봉기를 하였다.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이다. 약 3만 7천명의 키리시탄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히라성에 농성하여 약 12만여의 바쿠후군과 싸웠다. 3개월에 걸친 사움에서 봉기한 주민 대부분은 살해되고 종말을 맞이하였다.

 

왜 토쿠가와바쿠후는 서쪽의 작은 지여겡 대군을 투입하였을까? 그것은 봉기군의 배후에서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서양의 군사력이라던가 국가도 전복 할 수 있는 세력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난을 계기로 일본은 해외와의 교역을 제한하고 쇄국체제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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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성 혼마루에 세워진 아마쿠사 시로오 소년장수상>

 

봉기군을 통괄한 카리스마 아마쿠사시로오

양친은 아마쿠사의 오오야노 출신으로 부친의 마스다진노효에는 코니시유키나가의 가신이었다. 시로오의 서명이 남아있는 <시로오금령서>의 문면은 다른자가  썼다는 설이 있지만 카리스마에 추대될 정도로 똑똑한 소년이었던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