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Tour>남자한테 차여서 시코쿠라니
서른 살 오핸로 혼자 걷는 1,400km

 

김지영 저 | 책세상
정가 13,000원

 

여행엔 여러 종류가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인 시각의 즐거움을 찾는 여행이 있는 반면, 자아를 찾고 마음의 눈에 감성을 주는 여행도 있다. 어느쪽이 진정한 여행의 의미에 맞느냐고 물어도 물론 답은 없다. 여행이 주는 감성은 여행자 스스로 결정하고 경중을 나누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고, 꿈을 인정하는 과정을 적어 내려간 <남자에케 차여서 시코쿠라니>는 후자쪽에 가깝다. 저자가 찾아나선 곳은 시코쿠의 순례길인 오핸로. 우리나라에 제주 올레가 있고 스페인에 산티아고 길이 있다면 일본에는 그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순롓길, 오핸로가 있다. 오핸로는 일본 열도를 이루는 네 개의 섬 중 가장 작은 섬인 시코쿠 1,400km에 걸쳐 88개의 사찰을 순례하는 도보 여행을 말한다.
<남자한테 차여서 시코쿠라니>는 약 4개월여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겸한 오핸로 순례 여행의 기록이다. 다큐멘터리 촬영 여행이라는 흔치 않은 경험을 살려 꼼꼼한 관찰과 깊이 있는 내용으로, 국내 독자에게 아직은 낯선 시코쿠의 오핸로 순롓길을 소개한다.
꿈을 좇아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좌절하고 쫓기듯 떠난 일본, 그리고 걷게 된 시코쿠 순례길 위에서 저자는 저마다 고민과 상처, 잊고 싶은 기억을 큰 배낭만큼이나 한가득 짊어진 다양한 순례자들을 만난다. 그저 걷는다고 상처가 엷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고통 없는 삶은 없다는 것도 이미 눈치 챈 순례자들이지만, 순례를 통해 조금 더 단단해진 자신을 만날 것을 기대하며 솔직하고 담담하게 털어놓는 이야기가 유쾌하게, 때로는 가슴 뭉클하게 펼쳐진다.
저자의 오핸로 순례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겸한 여행이었기에, 평균적인 순례 기간인 한 달 반보다 세 배 가까이 긴 4개월여가 걸린다. 그리고 그만큼 보통의 여행자가 겪기 힘든 다양한 경험이 책 속에 담긴다. 
저자는 무료 숙박소를 운영하는 주인들을 만나 그들을 인터뷰한다. 험난한 현실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선행을 베푸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그들과의 인터뷰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또한 자신이 받았던 오셋다이를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주는 '오셋다이 수행'을 하며 순례자들이 길 위에 나선 속사정에 대해 듣기도 한다.
그 덕분에 저자는 오핸로 순롓길 안에서뿐만 아니라 길 밖에서 순롓길의 속살을 보는 특권을 누린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현지와 밀착된 유용한 정보들을 소개한다. 저자가 발로 뛰며 수집한 2009년 최신판 순롓길 무료 숙박소 리스트, 길 위에서의 긴급 상황 대처법 같은 구체적인 여행 실전 정보들은 언제든 그 길 위에 설 수 있도록 든든한 안내서의 역할을 해준다.
순례의 의미를 더하는 에피소드들도 읽을거리다. 저자가 만난 길 위의 순례자들은 저마다의 상처와 고민을 안고 있다. 그러나 마냥 우울하거나 슬프지만은 않다. 저자는 국적, 나이, 성별을 뛰어 넘어 엉뚱하고 유쾌한 순례자들을 만나며, 오핸로 순례가 묵묵히 '혼자 걷는 길'이지만, 동시에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함께 걷는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의 삶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작은 기적을 나눈다.
처음 순롓길에 올랐을 때만 해도 저자는 세상의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안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을 만나고, 함께 걸으며 오핸로 순롓길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타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발견은 항상 뭔가를 잃어버리진 않을까 두려워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인정으로 나아간다. 잃어버릴 것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길을 가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담담한 어조에서 20대를 보내고 비로소 30대를 맞이하는 성숙함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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